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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섀넌과 튜링의 만남

    섀넌은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직후부터 암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벨 연구소에서 진행된 연구 중 가장 유명한 건 ‘X 시스템(System X)’이란 이름의 워싱턴-런던 핫라인이었다.

    당연하게도 독일이 도청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벨 연구소의 엔지니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목소리를 변형시켰다. 독일에서 도청하지 못하도록 하는게 목표였다. 일부가 적에게 뺏기 더라도 복구하기 힘든 시스템을 만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당시 사용되는 암호는 전신에 적이 유추하기 힘든 특정한 무작위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하나의 키(key)로 작동했고 그 키가 완벽하게 전달되면 메시지 역시 완벽한 것이라고 판단됐다.

    언젠가 처칠과 루즈벨트의 목소리가 핫라인을 타고 전달될 예정이었다. 엔지니어 한 명이 새로운 암호 기술을 개발하면 다른 연구자가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독하는 일이 반복됐다. 엔지니어들은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신호를 무작위로 메시지에 섞어 보내는 기술을 발명했다.

    2차 세계 대전이 지속되는 동안 X시스템은 미국과 영국의 전쟁 전략을 맡고 있는 담당 부서 사이에서 정보를 교환하는 요긴한 장치로 사용됐다. 샘플링(sampling)과 양자화(quantization)라는 새로운 기술이 떠올랐다. 목소리는 다양한 높이와 크기로 나눠졌다. X시스템은 첫 디지털 통신 시스템이었다. 아날로그 신호를 전달하는 전화와 달리 X시스템은 몇 개의 숫자로 이뤄진 디지털을 통해 정보를 전달했다.

    X 시스템 개발은 비밀리에 이뤄졌기 때문에 섀넌도 정확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시스템 개발과 관련된 학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했다. 벨 연구소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전쟁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나무만 볼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자세한 기술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지만 그 기술들이 결합돼 만드는 전체적인 형태에 대해선 파악하지 못했다. 섀넌은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다. 다른 과학자들과의 교류 역시 제한적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없었다.

    1943년 1월 앨런 튜링(Alan Turing)이 뉴욕에 있는 벨 연구소를 방문했다. 목소리를 암호화하는 방법에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 미국을 찾았다. 그는 2달간 머물며 섀넌과 가끔 대화를 했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식사를 즐기며 만났던 그들은 자신들이 진행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튜닝이 연구하고 있던 이니그마(Enigma)에 대해서나 섀넌이 진행하던 벨 연구소의 일에 대해서는 대화 주제에 오르지 못했다. 카페에서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시면서 컴퓨터나 인간의 뇌를 자극하는 기계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눴다. 이와 함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기계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갔다. 튜링은 정보의 양을 측정하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그가 만든 반(ban)이라는 용어는 섀넌이 정보의 양으로 정의한 비트(bit)와 유사한 개념이다.

    1912년 6월 23일 런던에서 태어난 튜링은 어려서부터 수학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15살 때는 수학적 재능이 빼어난 ‘크리스토퍼 모컴’이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냈는데, 둘은 힘을 합쳐 엄청나게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2년 뒤 모컴이 결핵으로 숨지자 튜링은 깊이 낙담했고, 이때부터 필생의 과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지능을 기계에 넣어두는 방법을 고안하는 일이었다. 튜링은 18살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에 입학해서 수학을 공부했는데, 수치해석을 비롯해서 확률론과 통계학에 특히 큰 관심을 보였다. 1935년부터는 대학원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2년 뒤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문제의 응용에 관하여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라는 빼어난 논문을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논문에서는 컴퓨터의 기본 구상이 최초로 선보였는데, ‘튜링기계’라 불리는 가상의 연산 기계가 그것이었다. 읽기와 쓰기, 제어 센터,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이 튜링의 핵심 개념이었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튜링의 보편만능기계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튜링은 영국이 전쟁에 돌입한 지 하루 만인 1939년 9월 4일 런던 북쪽의 블레츨리 파크에 위치한 ‘정부암호학교’의 암호해독반 수학팀장으로 스카우트됐다. 섀넌은 튜링과 함께 일하면서 정보와 암호 기계 발명이 다양한 의견을 모았다. 둘의 만남은 정보이론의 탄생에 있어 중요한 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 조지 불과 섀넌의 만남

    작은 시골 마을의 게이놀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2년 미시건 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무엇인지 선택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라디오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고 무선 통신 모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반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친구 집에 전선을 연결하기도 했다. 전공은 전자공학과 수학이었다. 입학 4년 만인 1936년 2개의 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전자공학과 수학이다. 워낙 조용했던 탓에 대학 시절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대학 시절에 대한 기록을 비롯해 섀넌의 삶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기자들과의 인터뷰도 사양했고 조용한 은둔가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특별히 대외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2진수 등을 연구한 조지 불(George Boole)의 수업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섀넌의 인생은 학부 게시판의 공고문을 보곤 바뀌게 된다. 그 게시물은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대의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 교수가 조교를 모집하는 공고문이었다.

    부시 자신이 발명한 미분 해석기(differential analyzer)를 운영하는 조교를 모집했다. 미분 해석기는 간단한 아날로그 형태의 컴퓨터다. 현재 컴퓨터와 비교해 단순한 컴퓨터로 이해하면 된다. MIT 수학과에서 일하던 섀넌은 1937년에는 여름 방학을 맞아 벨 연구소를 찾아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해 미국 NBC 방송국은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영입해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한다. 크리스마스 밤 새롭게 단장한 RCA의 스튜디오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비발디의 ‘콘체르토 그로소’가 전파를 타고 방송됐다. 기술의 진보는 콘서트홀 대신 방송 스튜디오를 오케스트라의 무대로 만들었다.

    1938년 섀넌은 ‘릴레이 분석과 스위칭 회로(A Symbolic Analysis of Relay and Switching Circuits)’라는 석사 논문을 발표한다. 그가 발표한 논문은 요즘에도 전자공학을 배우는 학부생들의 수업에서 공부하고 있다. ‘논리회로’라는 이 과목에선 컴퓨터를 설계의 기본이 되는 과정을 다룬다. 그는 1940년 이 논문으로 엔지니어에게 수여하는 미국 알프레드 노벨상을 받는다. 발달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는 1987년 “섀넌의 논문은 이번 세기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명한 박사 논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MIT에서 연구에 전념하던 섀넌은 1938년 현재도 유명세를 띄고 있는 논문을 발표한다. ‘릴레이 및 스위칭 회로에 있어서의 상징적인 분석(A Symbolic Analysis of Relay and Switching Circuits)’이라는 제목의 논문이었다. 섀넌이 발표한 논문은 전자공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전공 과목에 포함되어 있다. 논문에서 섀넌은 여러 개로 연결된 전자 회로를 단순화 할 수 있는 방법을 간단한 방법을 제시했다. 수학적인 방법을 통해 복잡한 회로를 단순화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전자회로 설계 등을 통해서 배우고 있다. 이 논문을 통해 섀넌은 1940년 전자공학 분야에 주는 (스웨덴 노벨위원회에서 수여하는 노벨상과는 다른) 알프레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의 논문은 “지금까지 쓰여진 어느 석사 논문 보다 중요하다. 전자회로 분야에 있어서 필수적인 툴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전화선에 매료된 아이

    클로드 섀넌은 1916년 4월 30일 미국 미시건주 게이로드(Gaylord)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이 전화기를 세상에 내놓은 지 40년이 지나서였다. 미시건주 북쪽에 위치한 게이로드는 인구 3000명 정도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농지는 지평선 가까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섀넌의 할어버지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인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게이로드에선 지금도 섀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섀넌이 사망한 뒤 게이로드 시청은 시내 중심가에 섀넌의 탄생을 기념하는 공원을 만들어서다.

    아버지는 유언을 전담하는 판사였다. 독일 이민자의 딸이던 섀넌의 어머니 마벨 캐서린 울프(Mabel Catherine Wolf)는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이하게도 그의 할아버지는 농부이자 발명가였다. 자동으로 옷을 빨아주는 세탁기를 만드는 등 다방면으로 관심이 많았다. 발명품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항상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섀넌은 그랬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톡톡튀는 창조력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섀넌은 저글링을 하는 기계 등 익살스런 장난감을 발명했다. 그는 자신의 만든 장남감에 독특한 재미를 담았다. 예를 들어 미로에서 길을 찾는 장난감 쥐는 기억 장치를 통해 틀린 길을 회피할 수 있는 기능을 담았다. 기억 장치를 통해 살아 움직이는 생물쥐를 모방한 것이다. 미로에서 길을 찾는 쥐는 기억 장치와 정교한 수학적 원리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장난감 그리고 수학으로 채워져있다. 특히 빈 칸에 들어가는 숫자를 유추하는 수학 퍼즐을 즐겨했다고 전해진다. 누나 캐서린 울프 섀넌(Catherine Wolf Shannon)과 함께 수학 퍼즐을 푸는 시간이 많았다. 소설책 읽는 것도 즐겼는데 특히 애드거 앨런 포의 ‘황금벌레’는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고 한다. 황금벌레는 암호문을 풀어 숨겨진 보물을 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는 IEEE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종류의 것들이 나를 유혹됐어요. 특히 애드거 앨런 포우의 열열한 팬이었고 그가 쓴 황금벌레 같은 책엔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섀넌이 어린시절을 보낸 미국은 당시 새로운 발명품이던 전화기가 대륙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전화선은 작은 시골 마을인 게이로드까지 들어왔다. 경작지 사이에 길게 늘어져 있는 검은색 전화선을 보며 전화기의 원리를 상상하면서 전화기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전화선은 기술 진보의 상징이었다. 기술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섀넌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과학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1877년 벨이 가디너 허바드, 샌더스 등과 함께 벨 전화회사(Bell Telephone Company. 오늘날 AT&T의 전신)를 설립한 이후 10년 만에 미국에서 15만 명이 전화기를 갖게 되었다. 벨과 왓슨은 전화기 대중화를 위해 순회 설명회를 열었다. 인간의 음성이 기계적인 신호를 타고 5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전달됐다. 벨은 대중화를 위해 순회 설명회를 열었다. 그것은 쇼와 비슷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왓슨이 전화기를 통해 인사하고 노래를 부르면, 청중은 크게 놀라고 신기해했다.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설명회 입장권을 구하려 난리였다. 1877년 4월에는 보스턴에 있는 벨의 작업장과 서머빌 근처 찰스 윌리엄스의 집 사이에 최초의 전화선이 개설됐고, 같은 해 여름에는 당시의 ‘얼리어답터’ 200여 명(대부분 사업상의 필요에 의해 신청한 사업가들)을 위해 보스턴에 최초의 교환대가 설치됐다. 교환 서비스가 등장했지만 정보는 멀리 나를 수 있었다.

  • 클로드 섀넌, 정보의 창조자

    1948년. 정보는 새롭게 태어났다.  (인간이 정보를 이용한지) 정보와 인간이 만난지 7만년이 흐른 다음이었다.

    섀넌은 ‘통신에 관한 수학 이론(A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이란 논문을 통해서 디지털 시대라는 거대한 신세계를 열어젖혔다. 1948년 벨 연구소를 통해 발표된 이 논문에서 그는 정보의 전달을 다루고 있다. 그는 잡음(노이즈)이 있는 환경에서도 디지털 정보가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쉽게 말해 다양한 전파가 뒤섞여 있는 빌딩 숲에서도 휴대전화를 통해 일대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렇게 말을 해도 섀넌이란 과학자가 낯설지 모른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를 상징하는 비트(bit)라는 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거다. 정보의 양을 측정하는 최소한의 단위인 비트를 제안한 이가 바로 섀넌이다. 60여년 전 그가 만들어 낸 비트는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버금가는 대중적인 용어가 됐다.

    섀넌은 과학자가 아니라 엔지니어였다. 그가 걸어온 길은 창의성을 가진 과학자 혹은 수학자에 가까웠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로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모형쥐를 발명했고 저글링 장난감을 개발하기도 했다. ‘디지털 시대를 열어 젖힌 엔지니어’라는 평가를 받는 섀넌은 옛서사시의 주인공처럼 갑자기 등장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엔지니어였지만 세간의 주목을 받는 과학자는 아니었다. 과묵했고 진지했으며 혼자 연구하는 걸 즐겼다. 그가 활동했던 당시 디지털은 공학 교과서에서 논의되던 첨단 학문이었다. 대중들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점이 뭔지 몰랐다. 디지털이란 학문은 이제 막 피어나는 꽃봉우리처럼 기지개를 켜는 중이었다.

    정보를 새롭게 깨운 건 클로드 섀넌이었다. 어쩌면 정보가 다시 태어났다고 적는 게 보다 좀더 적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일단 겉모습이 변했다. 정보는 그해 디지털이란 새로운 옷을 꺼내입었다. 옷장 속 깊숙히 숨겨져 있던 디지털이라는 옷을 비로소 꺼내 입게 된 것이다. 옷장 속에 들어 있었으나 아날로그란 옷에 가려져 있던 그것이다. 디지털이라 불리는 옷은 검은색과 흰색, 두 가지 색깔로 지어진 옷이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0과 1은 디지털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다. ‘예’ 혹은 ‘아니오’라 말하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디지털이다.

    정보의 역사를 통틀어 1948년은 중요한 변곡점이다. 포물선이 초점을 지나는 순간 모든 운명이 뒤집어지듯 정보는 디지털을 만나면서 흐름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극적이지 않았다. 아르키메데스의 욕조나 뉴튼의 사과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상대성이론을 내놓은 아인슈타인의 사고 실험처럼 극적이라 생각되는 에피소드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처럼 너무나 조용한 혁명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정보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중력이나 부피는 우리에게 멀리 있지만 휴대전화는 한 순간도 놓을 수 없는 것이 됐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는 휴대전화에 매어있다. 그 만큼 인류가 정보통신에 기대어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국 출신 엔지니어 클로드 엘우드 섀넌(Claude Elwood Shannon, 1916~2001)이 있다. 디지털이란 새로운 옷을 재단한 건 그였다. 섀넌은 “어느 한 순간에 영감이 떠올라 정보이론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가 사용한 건 수학이라는 도구였다. 섀넌은 확실한 도구를 통해 맛도 색도 냄새도 없는 정보가 효율적으로 전달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CD플레이어와 휴대전화 등 디지털 무선통신이 생겨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그가 만들어낸 정보이론은 정보를 정의하는 새로운 도구가 됐다. 인류는 그러한 도구를 통해 정보를 다룰 수 있게 됐다. 맛도 색도 냄새도 없는 정보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인간에 의해 개발 된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석사 논문

    1938년 섀넌은 ‘릴레이 분석과 스위칭 회로(A Symbolic Analysis of Relay and Switching Circuits)’라는 석사 논문을 발표한다. 그가 발표한 논문은 요즘에도 전자공학을 배우는 학부생들의 수업에서 공부하고 있다. ‘논리회로’라는 이 과목에선 컴퓨터를 설계의 기본이 되는 과정을 다룬다. 그는 1940년 이 논문으로 엔지니어에게 수여하는 미국 알프레드 노벨상을 받는다. 발달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는 1987년 “섀넌의 논문은 이번 세기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명한 석사 논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섀넌은 석사 논문을 구상하게 된 이유를 명확하게 밝힌다.

    “복잡한 전기 시스템의 제어 및 보호 회로에선 릴레이 접점과 스위치를 다양하게 연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자동 전화 교환기, 산업용 모터 제어 장비 등 복잡한 작업을 자동으로 수행하도록 설계된 거의 모든 회로가 그렇다. 이번 논문에서는 그런 회로들에 대한 수학적 분석을 할 예정이다.”

    릴레이는 전기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스위치다. 현재로 릴레이는 각종 전자제품에 널리 쓰인다. 오디오용 앰프가 대표적이다.

    다양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논리회로는 전등 스위치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면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켠다. 해가 뜨면 그 반대다. 먹구름이 끼거나 낮이 짧아지는 겨울이 찾아오면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켜야하는 시점이 빠르게 찾아온다. 논리회로는 이런 다양한 조건을 고려해 만든다. 여기까지 오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조지 불이다. 섀넌은 불 대수를 스위치와 릴레이 접점에 적용했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다. 말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도 스위치의 작동 방식을 알 수 있다. 기계적 스위치의 역사는 오래됐다. 문을 열리지 않게 고정하는 걸쇠가 대표적인 아날로그 스위치다. 컴퓨터의 두뇌인 중앙처리장치(CPU)는 이러한 디지털 스위치를 다양하게 연결한 구조다.

  • 보이저 1호와 클로드 섀넌

    디지털 시대를 연 인물 중에서 클로드 섀넌을 가중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조지 불의 연구를 확장해 스위치를 통해 정보를 통제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여기서 스위치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열거나 닫을 수 있는 단순한 장치를 말한다. 전등을 켜고 끌 수 있는 전등 스위치가 대표적이다. 섀넌은 정보 전달의 이론적 배경으로 자리잡은 정보이론(Information Theory)을 고안했다. 정보이론은 잡음이 많은 상황에서도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송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증명한다. 하루 동안 147만km씩 지구와 멀어지고 있는 보이저 1호와 통신할 수 있는 건 섀넌의 정보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정보이론의 아버지 클로드 섀넌은 1916년 4월 30일 미국 미시건주 게이로드(Gaylord)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이 전화기를 세상에 내놓은 지 40년이 지나서였다. 당시 전화기는 생활 깊숙이 파고 들었다. 넓게 펼치진 평야에 집집마다 넓게 떨어진 탓에 일손이 부족하면 가까운 이웃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섀넌은 어려서부터 길게 늘어져 있는 전화선을 보고 자랐다.

    미시건주 북쪽에 위치한 게이로드는 인구 3000명 정도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농지는 지평선 가까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섀넌의 할어버지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인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게이로드에선 지금도 섀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게이로드 시청은 2000년 시내 중심가에 섀넌을 기념하는 클로드 섀넌 공원을 조성했다.

    아버지는 사업가이자 유언을 전담하는 판사였다. 독일 이민자의 딸이던 어머니 마벨 울프 섀넌은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이하게도 그의 할아버지는 농부이자 발명가였다. 자동으로 옷을 빨아주는 세탁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섀넌은 그런 할아버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의 톡톡튀는 창조력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그는 훗날 저글링을 하는 기계 등 익살스런 장난감을 발명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수학으로 채워져있다. 특히 빈 칸에 들어가는 숫자를 유추하는 수학 퍼즐을 즐겨했다고 전해진다. 누나 캐서린 울프 섀넌(Catherine Wolf Shannon)과 함께 수학 퍼즐을 푸는 시간이 많았다. 소설책 읽는 것도 즐겼는데 특히 애드거 앨런 포의 ‘황금벌레’는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고 한다. 황금벌레는 암호문을 풀어 숨겨진 보물을 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는 1982년 미국 전기전자학회(IEEE)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것들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특히 애드거 앨런 포는 최고의 작가였고 황금벌레와 같은 작품을 열심히 읽었다”고 말했다.

    섀넌이 어린시절을 보낸 시절은 새로운 발명품이던 전화기가 북미 대륙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전화선은 작은 시골 마을인 게이로드까지 들어왔다. 섀넌은 경작지 사이에 길게 늘어져 있는 검은색 전화선을 보며 전화기의 원리를 상상하고 했다. 

  • 불에서 섀넌으로-아날로그 컴퓨터

    정보를 전송하는 과학 기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1877년 벨이 가디너 허바드, 샌더스 등과 함께 벨 전화회사(Bell Telephone Company. 오늘날 AT&T의 전신)를 설립했다. 1877년 4월에는 보스턴에 있는 벨의 작업장과 서머빌 근처 찰스 윌리엄스의 집 사이에 최초의 전화선이 개설됐고, 같은 해 여름에는 당시의 ‘얼리어답터’ 200여 명(대부분 사업상의 필요에 의해 신청한 사업가들)을 위해 보스턴에 최초의 교환대가 설치됐다. 그후 10년 만에 미국 내 전화기 보급은 15만대를 넘어섰다. 벨과 왓슨은 전화기 대중화를 위해 순회 설명회를 열기도 했는데 사람의 음성이 전선을 타고 5Km 떨어진 곳까지 전달되는 건 마법에 가까웠다. 요즘에 비유하면 리얼리티쇼와 비슷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왓슨이 전화기를 통해 인사하고 노래를 부르면, 청중은 크게 놀라고 신기해했다. 소문이 퍼지면서 대중들은 설명회 입장권을 구하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섀넌은 학창시절 기계장치를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다. 라디오를 가지고 노는 것에 흥미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각종 통신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1km 떨어진 친구의 집과 전선을 연결해 모스 코드를 주고 받기도 했다. 

    작은 시골 마을의 게이놀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2년 미시건대에 입학한다. 대학 입학 4년 만인 1936년, 섀넌은 전자공학과 수학 2개 학위를 받았다. 섀넌은 조지 불(George Boole)과 그에게서 탄생한 불 대수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인생에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우연이 전환점을 만들기도 한다. 섀넌에겐 학부 게시판에 붙어 있는 작은 게시물이 그것이었다. 섀넌의 눈에 들어온 건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교수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 1890~1974)가 조교를 모집하는 공고였다. 부시는 자신이 발명한 미분 해석기(Differential Analyser) 운영을 담당할 수 있는 조교를 뽑았다. 미분 해석기는 휠과 디스크로 이뤄진 일종의 아날로그 컴퓨터다. 적분을 활용해 미분 방정식을 역으로 계산하는 원리였다.

    바네바 부시는 2차 세계대전 중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맨하튼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이중 하나였다. 그는 컴퓨터와 자동 계산 장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메멕스(MEMEX)라는 기억 확장기를 주장하는 등 당시에는 혁신적인 생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부시는 1945년 7월 애틀랜틱 기고문을 통해 다가올 미래를 예견했다. 그가 꿈꾼 미래는 현실이 됐다.

    “미래에 생겨날 장치를 생각해 봐라. 일종의 기계화된 개인 파일이나 저장소를 생각해 보라. 이름이 필요하면서 무작위로 메멕스(memex)라고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읽고 싶은 책을 저장해 놓고 듣고 싶은 음악도 담아둘 수 있다. 기계화된 통신 수단은 빠른 속도로 전송되고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기억을 보충하는데 쓰일 것이다. 메멕스는 마이크로 필름 형태로 구입할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책과 그림, 정기간행물, 신문을 이런 식으로 구입해서 보관할 수 있다.”

    “두 세기 전에 라이프니츠는 키보드로 무장한 계산 기계를 발명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널리 쓰이지 못했다. 당시 경제 상황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대량생산이 가능하지 않았다.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계산을 하는 노동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섀넌은 MIT로 향해 부시의 미분해석기를 마주한다. 독창적인 미래를 꿈꾼 학자를 만난 건 섀넌에게 큰 기회였다. MIT 수학과에서 일하던 섀넌은 1937년에는 여름 방학을 맞아 벨 연구소를 찾아 연구를 진행했다. 당시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라디오와 TV가 여전히 정보 전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섀넌이 벨 연구소로 향하던 그해 미국 NBC 방송국은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영입해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한다. 크리스마스 밤 새롭게 단장한 RCA의 스튜디오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비발디의 ‘콘체르토 그로소’가 전파를 타고 방송됐다. 기술의 진보는 콘서트홀 대신 방송 스튜디오를 오케스트라의 무대로 만들었다.

  • 조지 불, 논리와 수학을 결합하다

    논리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확립한 이가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류와 관계 짓기, 대조 등을 통해 논리학의 기초를 쌓았다. 오르가논(Oraganon)은 그가 정리한 논리학의 토대가 담겨있는 책이다. 

    오라가논의 내용은 방대하지만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어 이해하기 까다로운 편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징검다리를 놓듯 논리의 기초를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쌓아간다. 그가 쌓은 논리의 기초는 (*거의 모든 것들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의) 학문을 이루는 기반이 됐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건 삼단논법이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생 초등학생들도 삼단논법은 금세 이해한다. 사실 삼단논법을 익히기 전부터 인간의 뇌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는 어떤 측면에선 거창한 결과물처럼 보이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언어를 사용하는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단순한 규칙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논리를 수학으로 옮기는 작업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또 다른 무엇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언어를 독학한 불은 이런 점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진리들 사이에서 순서가 바뀌는 정도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을 만큼 중요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내 글이 생소하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작업이 추론의 과정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인간 지성의 법칙과 구성을 근본적으로 바꿀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논리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그 논리는 아닐 것이다.”

    불의 시도가 중요한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000여 년 간 철학과 언어의 영역에 머물던 논리가 새로운 영역을 만나 확장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불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논리는 수학이란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다. 기어 다니던 아기가 침대를 딛고 일어서면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 천 년간 서로 다른 길을 걷던 논리와 수학이 어느 한순간에 만난 것이다. 불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논리는 수학적 계산을 통해 증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수학에 능통한 기계 장치가 있다면 어떤 논리라도 단숨에 계산해 증명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

    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라가논에서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걸으며 수학 공식으로 이를 바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라가논에서 정언 명제(Categorical Propositions)를 도입하면서 논리학을 정립했다. 정언 명제는 예를 들면 이해하기 쉽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언 명제를 A E I O 4가지로 나눴다. 

    모든 N는 P이다.(A) 

    모든 N는 P가 아니다.(E) 

    어떤 N은 P이다.(I) 

    어떤 N은 P가 아니다.(O)

    예를 들어 ‘모든 염소는 동물이다’는 정언 명제 A로 분류할 수 있다. 불은 이를 xy = x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x가 상징하는 건 염소다. y는 동물을 상징한다. ‘xy = x’는  ‘x(1-y) = 0’로 바꿀 수 있다. 1이 상징하는 건 우주 그 자체다. 1-y 는 우주에서 동물을 제외한 그 무엇이다. 모든 염소는 동물이기 때문에 우주에서 동물을 제외한 것과 곱하면 0이 된다. 이런 식으로 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 명제를 수학적으로 해석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었지만 책에서 수식을 통해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건 불의 질문과 아이디어다. 불은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논리의 계산 방식이다. 물론 이 과정은 지금까지 알려진 수학의 체계를 통한다”라고 말했다.

    이를 확장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삼단논법도 수학적 방식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삼단논법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대전제-소전제-결론으로 이어지는 논리 흐름을 말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결론) 

    불은 삼단논법 역시 정언명제를 증명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수학적으로 해석해 증명한다. 이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삼단논법도 수학적으로 계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고 작용이 밟는 과정이며, 이것에 의하여 바르고 참된 인식을 얻기 위해 이 사고 작용의 법칙과 형식을 분명히 하여 사고가 거쳐야 할 길을 안내하는 것이 논리학이다. 

    불이 수학적으로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All Ys are Xs, y(1 − x) = 0, 

    All Zs are Ys, z(1 − y) = 0,

    Eliminating y by (13) we have z(1 − x) = 0,

    ∴ All Zs are Xs.

    불이 남긴 유산이 디지털 시대를 낳은 건 논리를 0과 1 그리고 간단한 수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논리를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인간 머릿속에 있는 사고의 흐름을 수학이란 새로운 언어로 풀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인간이 생각하는 과정을 수학적 기호와 연산 부호만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삼단논법을 통해 인간의 사고를 분석했다면 불은 세상의 모든 논리가 결국 0과 1로 귀결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 계산기계를 넘어서는 고민

    찰스 배비지가 계산기계를 놓고 씨름하던 그 무렵 영국 출신 수학자 조지 불은 계산 가능한 논리를 고민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활동했음에도 두 사람은 학문적 교류를 나누진 않았다. 배비지가 계산기계라는 하드웨어에 집중했다면 불은 수학과 논리라는 소프트웨어에 천착했다. 두 사람의 작업은 공통분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컴퓨터와 코딩이란 긴 역사를 놓고 보자면 두 사람은 그 어딘가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찰스 배비지와 조지 불.

    불이 집중했던 건 인간의 사고 과정과 그 속에 숨은 논리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마음을 찾아가는 심리학에 가까울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불은 철저히 수학적 과정을 통해 이를 보여줬다. 인간의 사고 과정을 수학을 통해 검증하고 증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사실 수를 더하고 빼는 계산이란 인간이 만든 발명품이자 인간이 모든 생명체에 앞선 능력이다. 수는 자연을 이루는 근본이지만 이를 확인해 학문의 영역으로 만든 건 인간이다. 계산이란 고도의 지적 능력은 인간의 사고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배비지가 만들려고 했던 계산기계는 이런 능력을 인간의 두뇌 밖으로 옮기려는 일종의 시도였다. 불이 집중했던 것도 배비지의 그것과 닮았다. 불은 인간의 사고 과정에 숨은 논리라는 일정한 과정을 바깥으로 드러내려는 작업에 도전했다. 배비지의 계산기계와 불의 논리학은 현대적인 컴퓨터의 근본이 됐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지점에서 열어 놓은 길은 현대적 컴퓨터에서 만난다. 만날 운명이라면 언젠가는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걸 배비지와 불은 증명한다.

  •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기 전쟁

    에디슨과 테슬라는 전기 모터 방식을 놓고 경쟁했다. 현대의 전기차는 테슬라가 개발한 3상 유도 전동기를 사용하는데 테슬라의 발명품이 처음부터 세상에 받아들여진 건 아니었다.

    테슬라가 3상 유도 모터를 개발한 건 1889년 무렵이다. 에디슨의 직류 모터는 구조상 모터의 회전하는 부품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브러시가 필요했다. 하지만 테슬라가 개발한 모터는 브러시가 필요하지 않았다. 회전하지 않고 고정된 모터 부품인 고정자에 교류를 흘려보내 회전하는 부품(회전자)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현대적인 전기차에는 에디슨과 테슬라의 기술이 섞여 있다. 전기를 저장하는 배터리는 직류로 에너지를 저장한다. 반면 전기차를 움직이는 모터는 교류 방식을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직류를 교류로 바꾸는 인버터가 쓰인다. 치열하게 싸웠던 두 사람의 화합작용이 전기차에서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두 사람의 전기 전쟁은 2017년 개봉한 커런트 워(current war)에 잘 묘사됐다. 전기 전쟁은 테슬라의 교류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기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고전압 직류전송이 주목받으며 에디슨의 직류가 주목받고 있다.

    고전압 송전선은 교류를 통해 전기를 운반하는데 이런 경우 전송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가 크다. 고전압 직류전송은 전송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가 극히 적다. 교류는 전압을 높이거나 낮추기 쉽다는 이유로 다양하게 쓰였는데 최근에는 직류를 변환하는 기술이 빠르게 발달해 송전용 고전압 직류를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