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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슨과 전기차

    전기차는 내연차보다 세상에 먼저 나왔다. 전기차가 처음으로 개발된 건 1881년이다. 프랑스 발명가 구스타프 트루베( 1839~1902)가 선보인 전기 삼륜차가 그 시작이다. 트루베는 납축전지, 지멘스 전기모터를 세발자전거에 결합했다.

    삼륜 전기차는 그해 4월 파리 시내의 발루아 거리를 주행했다. 세계 최초로 전기 모터로 이동하는 차량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미국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은 트루베의 삼륜차를 한 단계 진전시켰다. 그는 5만 번의 시험 끝에 배터리를 내장한 전기차를 개발했다. 트루베의 삼륜차와 외관에서 큰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4바퀴로 움직이는 전기차였다. 에디슨의 전기차는 시대를 앞서간 제품이었다. 시속은 35km 정도였는데 배터리 무게만 500kg에 달해 더 높은 속도를 내진 못했다. 배터리 충전에만 7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가장 큰 약점은 효율적이지 못한 모터 기술에 있었다.

    에디슨은 전기차와 전기철도, 배터리 등에서 100건이 넘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전기차를 개발했다. 특히 그가 만든 배터리는 니켈 등을 사용했는데 이는 현대적인 배터리와 소재면에서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기차는 내연기관에 뒤졌다. 전기차는 내연기관과 달리 매연도 없었고 소음도 적었다. 하지만 충전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었다. 여기에 헨리 포드와 석유 재벌의 내연기관 몰아주기가 더해지면서 전기차의 시대는 저물었다.

  • 테슬라 1대=리튬 10kg

    테슬라 전기차 1대에 들어가는 리튬의 양은 얼마나 될까. 테슬라 모델 3 롱레인지에는 4400여개의 리튬이온셀이 탑재된다. 셀은 전기를 일으키는 배터리의 최소 단위로 이해하면 된다. 배터리셀을 결합해 배터리모듈을 만들고 모듈을 이어붙이면 배터리팩이 된다. 테슬라와 같은 전기차에는 배터리팩 형태이 탑재된다.

    테슬라 모델 3 롱레인지 배터리팩에 포함된 리튬은 대략 10kg 수준이다. 마트에서 팔리는 쌀 한 포대에 맞먹는 무게의 리튬이 전기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기차는 대부분 비슷한 수준의 리튬을 가지고 있다.

    리튬은 많이 생산되는 금속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리튬 매장량은 8800만톤으로 알려져 있다. 생산한 리튬의 74%는 배터리 제조에 쓰인다. 나머지는 세라믹과 유리, 기타용품 생산에 쓰인다. 최대 생산국은 호주, 칠레, 중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이다. 미국은 1995년에는 전세계 리튬 생산량의 35%를 차지할 정도로 리튬 주요 생산국이었으나 최근에는 1% 수준으로 생산량이 줄었다.

    스웨덴 화학자 요한 아르프베드손은 1817년 리튬을 발견했다. 아르프베드손은 페탈라이트라는 반투명한 광물에서 칼륨 화합물을 찾고 있다가 스포듀민과 페타라이트라는 광물에서 우연히 리튬을 발견했다. 그는 화학 분석을 통해 페타라이트에 당시에는 발견되지 않은 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불꽃 반응을 통해 새로운 원소인 리튬을 확인했다. 아르프베드손은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암석을 뜻하는 그리스어 리토스(lithos)에서 따와 리튬이라고 불렀다.

    탄산리튬은 유리·세라믹·산업용 배터리에 쓰인다. 탄산리튬에서 탄소를 제거해 만드는 수산화리튬은 우주선이나 잠수함 내 공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제거하는 공기세척기로 사용된다.

  • 조지 불, 논리에 수학을 결합하다

    영국 수학자 조지 불(1815~1864)은 영국 링컨에서 1815년 11월 2일 태어났다. 링컨은 영국 수도 런던에서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아버지는 구두를 만드는 상인이었는데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들과는 둘도 없는 관계였다. 불의 아버지 존 불은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링컨 기계 협회(the Lincoln Mechanics’ Institution)에 참여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조지 불은 일찌감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학문에 눈을 떴으나 가정 형편으로 인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불은 외국어와 수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조지 불.

    불은 16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가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생활전선에 나서야만 했다. 19살이 되던 해에는 링컨에 작은 학교를 열었고 독학으로 배운 지식을 나눴다. 그는 34살이 되던 1849년 아일랜드 코크에 신설된 퀸즈대에 교수로 임용되기 전까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했다. 

    그는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5개 언어에 능통했다. 불은 16살 무렵에 미분(微分) 담은 수학 논문을 읽을 정도 성장했다. 23살에는 첫 논문 ‘변동 미적분학의 특정 정리(On certain theorems in the calculus of variations)’를 썼다. 이 논문은 불의 처음으로 발표되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완성한 그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아들의 배움에 적극적이었다.

    다양한 언어를 익혔던 불의 독학법은 훗날 그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불은 훗날 언어를 구성하는 논리와 수학을 결합하는 시도에 나선다. 불은 1839년 캠브리지로 가서 젊은 수학자 던칸 그레고리(1813~1844)를 만난다. 그레고리는 30살의 나이로 숨졌는데 불보다 2살이 많았던 그는 멘토를 자처한다. 고레고리는 불에게 논문 작성 방법 가르쳤고 불은 1841년 처음으로 수학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불은 영국 수학자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1806~1871)의 추천으로 퀸즈대 수학 교수로 임용됐다. 신생 대학이던 퀸즈대는 설립 초기 200여 명의 학생을 20명의 교수가 가르쳤다. 불은 20명의 교수 중 한 명이었다.

    드모르간은 런던 수학회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수학회의 첫 번째 회장을 역임했다. 드 모르간의 법칙으로 알려진 그는 숫자를 가지고 노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드 모르간은 “수학적 발견의 동력은 추론이 아니라 상상력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교수직을 맡은 불은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는 교수 부임 후 6년 동안 15편의 논문을 써냈다. 미분과 적분 등 일반적인 수학에 대한 연구에 전념했다. 불은 수학계에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1844년에는 ‘분석에 대한 일반적인 방법론(On a General Method in Analysis)’으로 영국왕립학회가 수여하는 로열 메달(Royal Medal)을 수상했다. 로열 메달은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한다. 

    불이 쓴 논리에 대한 수학적 해석(Mathematical Analysis of Logic)의 표지.

    불이 독창적인 연구를 선보인 건 1847년이다. 논리에 대한 수학적 해석(Mathematical Analysis of Logic)이란 책을 통해 논리와 수학의 결합을 시도한다. ‘연역적 추론의 계산에 대한 에세이(BEING AN ESSAY TOWARDS A CALCULUS OF DEDUCTIVE REASONING)’라는 소제목이 붙은 책은 90여 페이지 분량이다. 불이 시도한 건 논리를 수학적으로 푸는 과정이다. 여기서 잠깐. 논리라는 게 뭔가. 논리는 사고 작용이 밟는 과정이다. 인간의 사고는 일정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를 드러내는 과정이 바로 논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일례로 비가 오면 우산을 챙겨서 나가야 한다. 지극히 단순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런 사고의 과정에는 인류가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압축돼 있다. 논리학은 사고작용의 법칙과 형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 알렉산드로 볼타, MADE IN 이탈리아, 배터리

    배터리는 이탈리아 특산품이다. 배터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건 알렉산드로 볼타(1745~1827)다. 볼타가 배터리를 개발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1780년 경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 생물학 교수 루이지 갈바니(1737~1789)는 개구리를 해부하다 철봉에 매단 개구리 다리에 황동 철사를 대자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갈바니는 다리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동물전기라고 이름 붙이고 이를 1791년 발표했다.

    하지만 갈바니의 동물전기라는 개념은 틀린 것이었다. 볼타는 실험을 통해 동물전기의 오류를 증명했다. 개구리 다리 안에 동물전기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철과 황동이란 서로 다른 금속이 개구리 체액과 접촉하면서 전기가 발생한 것이었다.

    볼타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금속과 개구리 체액이 만나 전류를 만들어 내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금속과 수용액을 실험했다. 그 결과 소금물에 적신 종이를 은과 아연판 사이에 끼우면 전기가 발생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구리원판과 아연원판 사이에 소금물을 머금은 종이를 쌓아 올리면 더 큰 전기가 발생함을 증명해 발표했다. 바로 볼타 파일이다. 볼타는 소금물을 대신해 묽은 황산을 사용하면 더 큰 전기가 발생함을 발견했다.

    볼타는 양극과 음극, 전해액으로 이뤄지는 배터리 개념을 확립했다. 이를 통해 화학적 방법으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현대적인 배터리도 볼타 파일이 그 시작이다.

    배터리는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졌지만 세상을 바꿔놓고 있다. 작은 우연이 세상을 뒤집어 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작은 호기심도 그냥 넘기지 말자. 볼타가 남긴 교훈이다.

  • 니콜라 테슬라와 교류 모터

    전기차 제조사 테슬라의 사명은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1856-1943)의 성명에서 따왔다. 테슬라를 창업한 마크 타페닝은 전기 모터 개발의 선구자인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테슬라가 발명한 교류 모터는 도로 위를 오가는 전기차 테슬라의 모터에 쓰인다.

    니콜라 테슬라는 1856년 7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크로아티아 스밀잔에서 태어났다. 정교회 사제였던 아버지 밀루틴과 그의 아내 조지나 사이에서 2남 3녀 중 넷째였다. 그의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타고난 손재주 덕분에 다양한 농기구와 집에서 쓰는 각종 도구를 직접 발명해 사용했다고 한다. 네슬라는 12살 무렵에 김나지움에 입학하면서 부터 전기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18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테슬라는 콜레라에 걸려 9개월 가까이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콜레라도 3년 간의 오스트리아 군복무를 면제 받았다.

    테슬라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공과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 그리고 도박에 빠지면서 공과대학을 졸업하진 못했다. 이후 헝가리 중앙전신원에서 일하면서 전기 관련 연구를 이어갔다. 그는 1882년 파리에 있는 에디슨 지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곳에서 전기장비를 설계하던 일을 담당했던 그는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미국은 전기 혁명이 한창이었다. 에디슨이 만든 발전소에선 뉴욕 부유층과 극장 등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에디슨이 만든 모터는 직류였는데 고장이 잦고 누전으로 인한 화재도 많았다. 직류 모터는 구조상 전기 불꽃과 회전시 발생하는 소음 등을 피하기 어려웠다. 최근에는 전기 불꽃이 발생하지 않는 브러시리스 모터도 발명됐지만 교류 모터에 비해 수명이 짧다는 단점이 있다. 테슬라는 자신이 발명한 교류 모터가 장점이 많다는 사실을 앞세워 에디슨을 설득했지만 에디슨은 직류를 고집했다. 테슬라는 직류 모터를 다시 설계해 효율을 높였으나 에디슨이 약속했던 인센티브를 주지 않자 사표를 내고 테슬라 전기조명회사를 창업했다.테슬라는 교류 모터에 대한 특허를 냈고 특허료는 그가 발명을 이어가는데 있어 중요한 자산이 됐다.

    전기차 모터는 테슬라가 발명한 교류 모터를 기반으로 만든다. 1990년대만 해도 전기차에는 직류 모터가 쓰였다. 하지만 테슬라가 등장하면서 직류 모터는 사라졌고 전기차 구동계의 대세는 교류 모터가 차지한다. 토마스 에디슨과 전류 쟁탈전을 치루며 교류를 이끌었던 니콜라 테슬라처럼 전기차 회사 테슬라는 교류 모터를 하나의 흐름으로 가져왔다.

  • 전기차 시대에 다시 보는 에디슨과 테슬라

    토마스 에디슨. 니콜라 테슬라. 두 천재의 전쟁 같은 싸움은 지구 곳곳에 새겨져 있다. 직류와 교류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둘의 표준화 전쟁은 2019년 개봉한 커런트 워라는 영화에 담겨있다.

    두 명의 표준을 놓고 경쟁한 건 1880년대 미국이다. 에디슨은 직류를 전기를 전달하는 표준으로 정해야 한다고 봤다. 반면 테슬라는 안전성이 높은 직류보다 경제성에서 앞선 교류를 앞세웠다. 하지만 직류는 전기를 멀리 보내기 어렵다. 테슬라는 전기 분야에선 에디슨에 뒤쳐져 있었지만 변압의 용이성과 경제성을 무기로 에디슨의 직류가 주도하던 시장을 빼앗았다.

    텅스텐 필라멘트로 만든 전구는 교류와 직류, 전류 형태와 관계 없이 작동한다. 가정집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전구는 교류를 보내 불빛을 내지만 직류를 공급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다만 최근 늘어나는 LED 전구는 내부에 교류를 직류로 바꿔주는 컨버터를 내장해 교류를 직류로 바꾼 다음 LED에 직류를 공급해 불빛을 낸다.

    두 천재의 싸움에도 교류와 직류는 각각 장단점이 뚜렷하다. 전기밥솥, 선풍기와 같이 주변에서 흔히 쓰이는 가전에는 교류가 사용된다. 전압을 바꾸고 쉽고 전기를 운반하기 용이해서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와 같은 전자회로가 담긴 기기에는 직류가 쓰인다. 직류는 시간에 따라 전압이 일정하기 때문에 전자회로를 설계하거나 분석하는데 효율적이다.

    전기차에는 직류와 교류가 함께 쓰인다. 전기차 배터리는 직류로 전기를 저장한다. 반면 전기차를 움직이는 모터는 교류 모터가 쓰인다. 직류 모터는 효율이 높지만 소음이 많고 열 관리에서 단점이 많다. 반면 교류 모터는 전력 제어가 쉽기 때문에 모터 회전수 등을 쉽게 조절할 수 있다.

    직류로 전기를 저장하는 배터리로 교류 모터를 움직이기 위해서 전기차에는 인버터가 탑재된다. 인버터는 쉽게 말해 직류를 교류로 바꾸는 장치다. 인버터로 전력을 조절해 모터 회전 등을 제어한다.

    전기차 충전에는 직류와 교류 방식이 모두 쓰인다. 급속 충전의 경우 직류를 공급해 배터리를 충전한다. 이런 이유로 저속 충전보다 10배 가량 빠르게 충전이 가능하다. 반면 저속 충전은 교류 전기를 직류로 바꿔 배터리를 충전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급속 충전에 비해 배터리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에디슨과 테슬라는 이렇게 전기차에서 공존하고 있다.

  • 배비지의 분석 엔진

    배비지는 분석 엔진을 실제로 만들지 못했다. 그는 차이 기계를 다듬고 정교화는 작업에 여생을 바쳤다. 그럼에도 분석 엔진에 대한 설계도와 각종 아이디어 노트를 남겼고 새로운 메커니즘을 고안했다. 차이 기계에 대한 정부 지원마저 끊긴 상태에서 분석 엔진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는 건 불가능했다. 러브레이스가 분석 엔진에 대한 노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둘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를 통해 분석 엔진은 구체적인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당신이 보낸) 노트 D에 매우 만족합니다. 평소대로 명확하고 깔끔한 정리입니다. 사소한 것 하나는 내가 만들겠습니다. 이건 기계 장치를 충분하게 검토하지 못해서 발생한 것 같습니다. 서류 하나를 첨부합니다. 최근 다른 일로 고심하고 있는 가운데 당신이 전한 정보에 만족감을 얻었습니다. 찰스 배비지.”

    “작성하고 있는 노트에 베르누이 수에 대한 내용을 넣고 싶습니다. 사람의 머리나 손으로 계산하지 않고 분석 엔진이 이를 계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필요한 데이터와 공식을 보내주세요. AAL(아다 러브레이스).”

    러브레이스는 분석 엔진을 통해 베르누이의 수(자연수의 거듭제곱의 합을 구하는 공식 등에 쓰이는 수열)를 계산할 수 있음을 노트를 통해 보여줬다. 그녀는 입력 데이터와 작동하고 있는 변수, 결괏값 등으로 나눠 분석 엔진을 통해 베르누이의 수를 계산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계산은 25차례로 나눠서 진행되는데 중간 결괏값은 디스크에 저장된다. 이 과정에서 덧셈 8번, 뺄셈 7번, 곱셈 5번, 나눗셈 5번이 진행된다. 러브레이스가 제시한 계산법은 분석 엔진 계산에 쓰이지 못했지만 그녀는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불린다.  러브레이스가 남긴 계산 과정은 세계 최초의 기계식 컴퓨터 알고리즘(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령들로 구성된 일련의 순서화된 절차)이다. 분석 엔진을 만들지 못했기에 그녀가 남긴 알고리즘은 사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식 컴퓨터에 당장 대입해도 작동할 정도로 정교하고 치밀하다. 

    아다 러브레이스가 만든 베르누이수 계산 엔진 표. 세계 최초의 프로그램이자 최초의 코딩이다.

    물론 러브레이스가 노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배비지가 어떤 수준에서 관여를 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 노트는 러브레이스의 이름으로만 발표됐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상당한 수준에서 협업을 진행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러브레이스는 노트를 발표한 지 9년 후인 1852년 11월,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궁암을 몇 달에 걸쳐 투병하던 그녀는 세 명의 자녀를 남겼다. 그녀는 매리 막달렌 교회 묘지에 잠든 아버지 옆에 묻혔다. 

    러브레이스는 “수학만이 우리가 자연 세계의 위대한 사실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구성한다”라고 썼다. 그녀는 컴퓨터가 인간보다 더 강력하고 빠른 분석을 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미래의 분석 용도를 위해 새롭고 방대하고 강력한 언어가 개발되어 그 진리를 사용하여 인류의 목적을 위해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실제 적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1983년 미국 국방부는 그녀의 업적을 기려 개발된 새로운 컴퓨터 언어에 그녀의 이름(Ada)을 붙여주었다.

    러브레이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배비지는 차이 기계를 개선하는데 여생을 받쳤다. 찰스 배비지는 1871년 10월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방광염과 관련된 신장이상이 사망 원인이었다. 배비지 사후 그의 뇌는 절반으로 나뉘었다. 그의 뇌 절반은 런던 헌터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나머지 절반은 런던 과학 박물관에 차이 기계와 함께 전시돼 있다. 배비지는 그의 아들 헨리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 뇌를 보존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중략) 현명한 결정을 하리라 믿는다. 인류 지식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판단할 거라고 본다.”

  • 가벼움으로 세상을 지배한 리튬

    원자번호 3번.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금속. 바로 리튬이다. 리튬은 손으로 자를 수 있을 정도로 무르다. 녹는점 180.54℃, 끓는점 1347℃로 고체 원소 중에선 밀도가 가장 낮다. 리튬이 재사용 배터리 제조에 쓰이는 건 가볍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나 노트북이 세상을 지배하는 물건이 된 건 가벼운 리튬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벼움으로 세상을 바꾼 물건이다.

    하지만 리튬은 다루기 까다로운 금속에 속한다. 리튬은 물보다 가볍지만 물에 닿으면 폭발을 일으킨다. 공기중에선 질소와 반응하기에 휘발유 등에 넣어서 보관하기도 한다.

    리튬이 배터리 제조에만 쓰이는 건 아니다. 리튬은 조울증 치료제로 쓰이는 가장 간단한 약제다. 호주 의학자 존 케이드(1912~1980)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리튬이 기니피그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연구를 이어간 케이드는 직접 리튬을 복용해 안전성을 확인했고, 1948년 조증 환자에게 처음으로 리튬을 투여했다. 효과는 놀라웠다. 5년 동안 증상이 개선되지 않던 환자가 리튬 복용 5달 만에 퇴원한 것이다. 그는 1949년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했다.

    리튬이 조울증을 치료하는 원리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약효 때문에 조울증 환자에게 일반적으로 처방되는 약물로 자리 잡았다. 환자는 탄산리튬 형태로 복용하지만 독성도 무시할 수 없다. 혈중 리튬이온 농도가 치료 농도라 하더라도 독성이 발생할 수 있다. 제약사 경고 문구엔 리튬을 처방할 경우 혈중 리튬이온 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적혀있다.

    리튬은 마음을 치료하는 금속이자 세상을 움직이는 금속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배터리에 흔히 쓰인다. 리튬이 배터리 시장을 제패한 건 무게와 관련이 있다. 가장 가벼운 금속이기에 휴대성을 높일 수 있다. 엔진 시동용 납축전지는 두 손으로 들어 올리기도 버거울 정도다.

    미국 락그룹 너바나의 곡 중에는 리튬이란 곡이 있다. 조울증을 앓았던 커트 코베인은 탄산리튬을 복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사에는 조울증 환자의 심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I’m so happy ’cause today I found my friends

    They’re in my head
    I’m so ugly, that’s okay, ’cause so are you
    We broke our mirrors
    Sunday mornin’ is everyday for all I care
    And I’m not scared
    Light my candles in a daze ’cause I’ve found God

  • 모바일 세상은 배터리에서 태어났다

    생각해 보면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세상이 시작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집이나 사무실이 아니면 전화기를 연결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컴퓨터를 들고 다니며 카페에 앉아 혹은 기차 의자에서 비디오를 보는 세상이 찾아올 것이라는 걸 누가 쉽게 상상했을까.

    모바일 시대를 만든 건 반도체라는 칩이 큰 역할을 했지만 이런 세상이 가능하게 만든 건 리튬 이온 배터리의 공이 컸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충전해서 재사용할 수 있는 배터리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 충전해서 재사용하지 못하고 일회용으로 폐기해야 한다면 모바일 시대가 이렇게 빠르게 열리진 못했을 것이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시작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5년 요시노 아키라가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한 것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뤄진 재사용 가능한 2차 전지 연구가 있어서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미국 뉴욕 빙엄턴 대학교의 스탠리 휘팅엄(Stanley Whittingham) 교수와 엑슨에 의해 1970년대에 처음 제안되었다. 휘팅엄 교수는 이황화티탄을 양극으로, 금속 리튬을 음극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1980년에 라시드 야자미를 필두로 하는 그르노블 공과대학(INPG)과 프랑스 국립 과학 연구센터의 연구진에 의해 흑연 내에 삽입된 리튬 원소의 전기화학적 성질이 밝혀졌다.

  • 모든 전기차는 에디슨에게 빚지고 있다

    최근 생산되는 전기차의 모터를 구동시키는 건 리튬이온 배터리다. 이 배터리는 크게 양극재, 음극재, 전해액, 분리막 4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이중에서 동을 얇게 펴서 만드는 동박은 음극재 소재로 쓰인다.

    동박은 배터리 내부에서 전류를 흐르게 하는 이동 경로를 이룬다. 배터리 내부에서 발생하는 열을 외부로 방출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토마스 에디슨의 동박 제조 특허.

    동박은 얇게 펴서 만드는 공정이 핵심이다. 이 과정은 금속 도금 과정과 비슷했다. 우선 티타늄으로 만든 거대한 드럼에 황산에 구리를 녹인 황산구리 용액을 흘려보낸다. 용액이 담긴 드럼에 전기를 흘려보내면 얇은 구리 막이 생성긴다. 이게 바로 동박이다.

    동을 최대한 얇게 펴서 만드는 동박 제조에 쓰이는 건 최신 기술이 아니다. 동박과 같은 얇은 금속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방법은 약 100년 전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처음으로 고안했다. 에디슨은 1922년 금속 드럼을 활용해 동박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특허를 냈다. 최신의 기술로 무장한 동박 공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생산 원리는 에디슨이 발명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전기차의 핵심 기술이 100년 전 에디슨의 발명 특허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