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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과 당신 사이-코딩을 익혀야 하는 이유

    당신이 디지털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손가락 10개 이상으로 꼽을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주변만 살펴도 디지털이 세상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신의 손바닥에 가지런히 안겨 날씨를 알려주고 문자를 주고받고 인터넷 게임을 할 수 있게 하는 스마트폰이 그렇다. 스마트폰은 현대적인 디지털 기술이 집중된 대표적인 물건이다.

    최신 쓰이는 슈퍼컴퓨터는 1초에 1000조 번을 계산할 수 있다. 인간의 두뇌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이보다 더 빠르게 계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엔비디아가 판매하는 99달러짜리 인공지능 컴퓨터 젯슨 나노는 472기가플롭스를 계산할 수 있는데 이는 초당 4720억 번의 부동소수점 계산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컴퓨터는 저렴해지고 빨라졌다. 이게 디지털 기술 발전을 이끄는 핵심 요소다. 일례로 자동차 시장은 프리미엄 브랜드를 내놓으면서 성능이 좋아졌는데 가격에 그에 비례에 상승했다. 반면 디지털 기술은 이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일례로 삼성종합기술원이 1992년 도입한 슈퍼컴퓨터는 1.32기가플롭스 연산이 기능했다. 이는 초당 13억 2000회의 부동소수점 연산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99달러에 손바닥보다 작은 컴퓨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렸던 것이다. 젯슨 나노와 30년 전 슈퍼컴퓨터는 성능면에서 30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수 십 년 전 기업 연구소에서 활용하던 슈퍼컴퓨터가 모든 이들의 손에 들려 있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컴퓨터 발전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인공지능이란 AI가 삶으로 들어온 것도 비슷한 배경에서다. 사진이나 동영상 속 특정 물건을 인식하는 등 특별한 계산 분야에서 컴퓨터는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당신에게 컴퓨터가 꼭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더는 미뤄둘 수 없는 건 교육부가 나섰기 때문이다.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코딩은 의무 교과목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교육부는 지난 8월 ‘초·중학교 코딩교육 필수화’를 디지털 인재양성 종합방안을 발표했다. 초·중학교 정보교과 시수를 2배 이상 확대하고 중학교의 경우 시험도 치르겠다는 방침도 내놨다. 사교육 시장은 벌써부터 움직이고 있다.

    40대 학부모라면 기술 시간에 살짝 지나친 컴퓨터의 구조 정도가 떠오를 것이다. CPU가 중앙처리장치이고 메모리는 기억 장치라는 단순한 기억이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당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코딩을 알지 못하면 적응하기 어려운 사회가 됐다.

    적어도 컴퓨터가 작동하는 방식과 코딩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꼭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에게 꼭 필요한 지식이자 당신의 아이와 대화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게 됐다.

    조금 더 단순화하자면 당신이 코딩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와 같은 사칙연산을 컴퓨터보다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를 세워놔서 그렇다. 체스에 이어 바둑에서도 인간은 컴퓨터에 따라 잡혔다.

    하지만 컴퓨터가 인간을 앞서지 못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창의성과 이해 능력이다. 우리는 컴퓨터처럼 빠르게 계산할 없지만 1초에 1000조 번 계산할 수 있는 컴퓨터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움직이는 건 아주 단순한 논리다. 그 체계를 만든 건 인간이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코딩 교육이 중요하지만 단순히 기술적인 교육에서 끝나선 안 되는 이유다.

    단순한 기술에서 벗어나 컴퓨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컴퓨터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코딩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 계산기를 꿈꾼 그의 두뇌만 남다

    경제적 지원이 끊길 위기에 처한 배비지는 분석 엔진을 만들기 위해 여려 곳을 돌며 자금을 모집했다. 머릿속 아이디어와 분석 엔진 설계도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배비지는 영국 정부의 재정 지원이 끊기기 전인 1842년과 1843년 이탈리아 토리노 등을 찾아 분석 엔진 제작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 그의 간절함이 통했을까. 설명회에 참석했던 젊은 엔지니어 루이지 메나브레아는 배비지의 설명을 받아 적고는 ‘찰스 배비지가 개발한 분석 엔진에 대한 스케치’를 발표했다. 배비지가 고안한 분석 엔진에 대한 간단한 이론적인 분석을 담고 있는  논문은 1842년 10월 학술 저널(Bibliothèque Universelle de Genève)에 실렸다. 영국보다 해외에서 분석 엔진이 알려진 것이다. 이에 러브레이스는 프랑스어로 작성된 분석 엔진 소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러브레이스가 영어로 번역한 논문은 1843년 발표됐다. 그녀는 번역에 착수하면서 노트라고 적힌 해설서를 남겼는데 특이하게 해설이 본문보다 3배 이상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러브레이스는 배비지와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노트를 가다듬었다. 배비지는 “노트가 아니라 새롭게 글을 만들어서 정리를 해보는 게 어떠냐”라고 조언했으나 러브레이스는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트에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곳곳에 담겼다. 대표적인 건 종이 카드를 활용한 입력 장치다. 러브레이스는 구멍이 뚫린 종이 카드를 활용해 분석 엔진에 필요한 명령을 줄 수 있고 이를 재사용할 수도 있다고 봤다. 계산에 필요한 숫자를 기계에 입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현대적인 컴퓨터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키보드를 통해 입력한 숫자는 모니터로 표출되고 엔터를 입력하면 컴퓨터가 계산을 끝난다. 계산기 프로그램에 있는 사칙연산은 언제든 꺼내서 재사용이 가능하다. 러브레이스의 종이 카드와 다르게 현대적인 컴퓨터는 하드디스크에 프로그램을 저장하고 있을 뿐이다. 러브레이스는 분석 엔진에 종이 카드를 사용하면 반복되는 작업을 간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카드 반복의 힘은 필요한 카드의 수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다. 이런 기계 계산은 수학적 연산이 반복되는 모든 곳에 적용할 수 있다. 계산할 데이터를 준비할 때 (반복 작업에 대한) 프로세스의 순서와 조합을 고려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반복적인 작업에서 인류가 해방되는 건 증기기관을 고안했던 이들의 일차적인 목표였다. 이를 통해 노동력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생산성은 높일 수 있다. 배비지가 꿈꿨던 계산이 가능한 기계적 장치도 이런 꿈에서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분석 엔진은 차이 기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차이 기계는 처음부터 설계된 계산만 가능했지만 분석 엔진은 그런 한계를 뛰어넘었다. 애당초 설계된 기능을 넘어서 작업자가 원하는 어떠한 계산도 수행할 수 있었다.

    “차이 기계는 특정하고 매우 제한된 연산 세트를 구현한다. 차이 기계는 산술적으로 엄격하게 정의된 범위 내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분석 엔진은 정해진 경계선이 없다. 분석 엔진은 우리의 지식과 함께 확장된다. 여기에 쓰이는 분석 법칙은 인간의 지식에 확장하는 곳까지 나아갈 수 있다.”

    러브레이스는 인류의 지식이 확장하면 확장할수록 분석 엔진의 계산 능력도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는 너무나도 흔한 컴퓨터지만 당시에는 어렴풋한 컴퓨터 모델도 마련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녀의 선구안은 실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이후 디지털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인간의 음성을 자동으로 인식해 명령을 수행하는 능력까지 컴퓨터는 탑재했다. 여기에는 컴퓨터를 제어할 수 있는 음성 인식 기술을 인간이 개발했기 때문이다.

    분석 엔진은 조작자가 원하는 명령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지점이 차이 기계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분석 엔진이 한 단계 진보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분석 엔진은 계산을 진행하는 중단 단계에서 나오는 숫자도 저장할 수 있었다. 현대적인 컴퓨터는 메모리가 데이터를 저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석 엔진은 서로 다른 기계 장치를 활용해 숫자를 저장하고 이를 활용했다. 러브레이스는 이를 “창고(storehouse)”라 불렀다.

    “분석 엔진의 창고는 디스크를 수직으로 쌓아 올린 부분에 해당한다. 각각의 디스크에는 0에서 9까지 적힌 숫자가 가장자리에 새겨져 있다. 각 디스크는 서로 접촉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디스크는 회전하면서 새겨진 숫자 표출한다. 가장 아랫부분에 있는 디스크는 일의 자리를 그 위에 있는 디스크는 십의 자리를 표시한다. 그다음은 백의 자리를 표출한다.”

  • 세계 최초의 코더, 아다 레브레이스

    그의 설계에 따르면 차이 기계는 높이 2.4m, 무게는 10t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장치였다. 하지만 배비지의 차이 기계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프로젝트는 진행이 더뎠고 예상보다 느린 속도에 영국 정부도 재정적인 지원을 끊었다. 배비지와 엔지니어와의 관계도 썩 좋지 않았다. 배비지는 1833년 차이 기계 일부를 완성했으나 그가 처음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완벽한 기계 장치를 완성하진 못했다. 배비지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배비지의 설계도를 현실로 만들기에 당시 기술력으론 불가능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그의 설계에 따르면 차이 기계는 2만 5000개의 부품이 필요했다. 부품 대부분은 당시에는 널리 쓰이지 않았던 것들로 기계를 제작하기 위해선 별도로 제작해야만 했다. 톱니바퀴 하나도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차이 기계에 영국 정부가 투자한 금액은 당시 돈으로 1만 7000파운드에 이른다. 배비지는 사재 2만 파운드를 투자했다. 영국 정부는 기약이 없는 프로젝트에 더이상 투자할 수 없다면 자금 지원을 철회했다. 배비지는 생전에 자신이 설계한 차이 기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배비지의 꿈은 훗날 현실이 됐다. 런던 과학 박물관(London Science Museum)은 1985년 배비지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 차이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차이 기계는 배비지 탄생 200주년이 되는 1991년 완성됐다. 이 장치는 4000개의 정교한 부품으로 조립됐고 무게는 2.5톤에 달했다. 그의 독창적인 계산 기계 장치는 한참 지나서야 현실이 된 것이다.

    배비지가 여기서 멈췄다면 그가 컴퓨터의 아버지(*엄밀하게 표현하면 최초의 기계적 컴퓨터 제작자)로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배비지의 차이 기계 제작은 실패했지만 그는 차이 기계를 개선한 차이 기계 2번을 설계했다. 1847년부터 1849년까지 작업한 차이 기계 2번은 31자리 숫자를 계산할 수 있다. 기계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부품은 획기적으로 줄였다. 차이 기계 2번은 전작인 차이 기계 1번에 들어간 부품의 3분의 1만으로 비슷한 성능을 냈다. 런던 과학 박물관이 제작한 차이 기계는 배비지가 두 번째로 설계한 차이 기계 2번이다. 증기기관이 아니라 성인의 팔힘 만으로도 차이 기계는 작동한다.

    배비지는 차이 기계를 만드는 프로젝트가 실패한 뒤 또 다른 계산 기계를 고안했다. 실패로 끝났음에도 배비지의 계산 기계에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건 아다 러브레이스(1815-1852)다. 러브레이스는 영국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1788-1824)의 딸로 태어났다. 바이런은 1815년 안네 이사벨라 밀반케(1792-1860)와 결혼했지만 1년 만에 헤어졌다. 밀반케는 홀로 러브레이스를 키웠다. 러브레이스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딸이 과학과 수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이끌었는데 이는 아버지의 어두운 문학적 재능을 이어받길 원하지 않아서였다. 어머니의 노력 덕분에 러브레이스는 어려서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러브레이스는 아버지의 반항적인 기질도 이어받았다. 

    당시 수학계는 여성이 활동하기 쉽지 않은 분위기였으나 러브레이스는 이에 도전했다. 그녀가 지난 사회적 배경은 내노라하는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여기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기질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러브레이스는 18살 무렵인 1833년 배비지와 처음으로 만났다.

    이 무렵 배비지는 차이 기계의 실패를 뒤로하고 새로운 장치를 고안하고 있었다. 그가 분석 엔진(Analytical Engine)이라 부른 장치는 현대의 컴퓨터와 비슷했다. 원하는 명령을 입력하면 분석 엔진이 계산된 결과를 내놓았다. 당시 그의 상황을 말해준 일화가 있다. 1842년 11월 11일 배비지는 영국 총리 로버트 필을 만났다. 배비지는 총리를 앞에 두고 “정부가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새로운 분석 엔진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는 요청도 잊어버렸다. 필 총리는 배비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1843년 1월 5월, 배비지는 정국 정부로부터 차이 기계 프로토타입을 킹스 칼리지 박물관으로 전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부터 두 달 뒤인 1843년 3월 영국 정부는 배비지에 대한 재정 지원을 공식적으로 중단했다.

  • 2.4미터 10톤, 하지만 미완성

    배비지는 1822년 6월 인간을 대신해 수식을 계산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 발표했다. 차이 기계(Difference Engine)라고 불리는 이 장치는 다항식 계산도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그는 영국 왕립천문학회를 통해 ‘천문 및 수학 테이블 계산에 기계를 적용하는 방법에 대한 노트(Note on the application of machinery to the computation of astronomical and mathematical tables)’를 공개했다. 

    “알려진 것처럼 학회 회원 몇 분과 내가 지난 몇 달간 고안한 기계 장치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 움직이는 부품으로 우리가 필요한 수표를 계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학회 회원들에게 성공적인 결과에 도착했음을 알려드린다. 천문학 연구 목적에 꼭 필요한 수표들을 만드는 데 이 연구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수표를 만드는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기계를 만드는데 차분법을 활용했다. 2차 방정식이 지금까지 내가 개발한 한계다. 이를 활용하면 삼각수와 제곱수 등을 계속해서 만들 수 있다. X2+X+41 과 같은 방정식에도 응용할 수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속도처럼 엔진은 움직일 수 있다. 기계 장치는 아주 간단하게 적은 부품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계산을 해낼 수 있다. 이런 계획을 실행해 나가는 데 있어 계산이 정해지는 과정에서 기계 장치 일부를 만들었다. 이를 활용하면 오류를 없앨 수 있고 엔진이 수표를 직업 출력할 수도 있다. 이런 장치를 만들 수 있다면 수표에 있는 각종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다양한 실험에 기대 보면 내가 제안한 장치가 성공할 수 있다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1822년 6월 2일.”

    배비지는 그의 기계가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하기를 원했다. 기계는 자동으로 작동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사람이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기계가 계산을 끝내면 자동으로 계산 결과를 인쇄해야 한다. 계산과 인쇄의 과정 모두에서 사람이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822년 12월 ‘수학 테이블 계산에 기계를 적용하는 방법에 대한 논평(Observation on the application of machinery to the computation of mathematical tables)’을 다시 발표했다. 반년 전에 발표한 메모를 구체화한 것이다. 배비지는 “계산하는 기계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일부 회원들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며 “이번에 제안하는 계산하는 기계를 천문학 테이블에 적용할 수 있다면 계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줄일 수 있고 그건 결국 인류의 행복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인간의 지식을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적었다.

    배비지가 설계한 차이 기계는 차분법(Calculus of Finite Differences)을 활용한다. 차분법은 2차 방정식에 특정한 수를 대입한 뒤 나온 결괏값과 대입한 수에 1을 더한 후 나온 결괏값을 서로 비교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특정한 패턴이 생기는데 이를 활용하면 차이 기계를 만들 수 있다. 배비지는 차이 기계 중 일부를 시험 제작했다. 차이 기계 제작에 나선 건 1823년으로 영국 정부에서 1500파운드를 지원받아 본격적인 제작에 나선 것이다. 배비지는 영국 최고의 엔지니어를 고용해 그가 고안한 설계도에 기반해 차이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 천 개의 톱니바퀴가 투입된 차이 기계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영국 정부의 도움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배비지는 기계 제작에 사재를 투자했다. 그의 아버지는 1827년 세상을 떠났는데 배비지에게 10만 파운드에 달하는 유산을 남겼는데 그중 일부가 제작비로 쓰였다.

  • 작은 꿈이 현실로, 계산하는 기계의 탄생

    위대한 발명품도 그 시작은 소박한 꿈이다. 밤하늘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보름달을 향한 꿈은 로켓 발명으로 이어졌다. 축음기는 목소리를 저장해 놓고 싶은 순수한 꿈에서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의 대표 선수이자 인류의 삶을 완벽하게 바꿔놓은 컴퓨터도 그 시작은 인간 대신 계산하는 기계장치였다.

    스스로 계산하는 기계장치, 컴퓨터에 대한 꿈이 시작된 건 영국이다. 당시에는 현실이 되지 못했지만 그 꿈은 입력을 받아 정해진 계산을 마치는 현대적인 컴퓨터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자동으로 계산하는 기계식 장치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를 고민한 건 영국 엔지니어 찰스 배비지(1791-1871)다. 배비지는 공학뿐만이 아니라 수학, 철학과 발명에 관심이 많았다. 배비지가 고안한 건 기계식 컴퓨터였다. 현대적인 컴퓨터가 전자 신호를 통해 다양한 계산을 한다면 배비지가 고안한 건 톱니 등 각종 기계장치를 기반으로 한 기계식 컴퓨터였다.

    배비지는 영국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영국 은행가에서 성공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경제적으로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배비지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7살 무렵에는 장난감을 분해하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장난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분해해서 살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학교에선 수학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에선 혼자서 미적분을 공부하기 위해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에 몰래 교실로 들어가 수학을 공부를 하기도 했다. 수학과 다양한 기계에 매료된 배비지는 1810년 캠브리지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다. 

    찰스 배비지

    대학에 입학해서도 그의 수학 사랑은 이어졌다. 당시 대학에서 수학과 공학은 주도적인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인문학을 중심으로 교과목이 짜여 있었기에 배비지는 그의 동료들과 수학을 스스로 익혀야 했다. 배비지는 동료들과 함께 해석 학회(Analytical Society)라고 불리는 모임을 만들어 프랑스어로 된 미적분학 교과서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해석 학회는 현재 미적분학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dy/dx(이전 x’에서) 표기법을 대중화하는데 기여했다. 이런 노력이 더해지면서 배비지는 영국 수학계에서 인정받게 된다. 배비지는 1812년 캠브리지 피터하우스로 학적을 옮겼고 그곳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는 가장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아 시험 없이 졸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영국 수학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졸업 후 왕립 연구소에서 천문학을 강의했다. 

    남부러울 게 없을 거 같던 그의 삶이 항상 순탄한 길만 걸어간 건 아니었다. 배비지는 결혼은 서둘러야 한다는 아버지의 조언으로 1814년 조지아나 휘트모어(Georgiana Whitmore)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이중 네 명은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도 결혼식을 올린 지 14년 만인 1827년 세상을 떠났다.

    증기기관과 계산하는 기계

    배비지가 계산하는 기계를 고안하게 된 건 당시 사회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계산하는 기계에 대한 아이디어가 영국에서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탄생한 증기기관은 산업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석탄이 내뿜는 연기와 흰색 증기는 도시의 모습을 하나 둘 바꿔놨다. 기계는 그동안 넘보지 못했던 영역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대신해 배틀을 짜고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렸다. 증기로 무장한 기계의 막강한 힘이 인력을 대체했다. 

    하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강력했던 증기기관도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앞서진 못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계산이었다. 당시 계산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었다. 숫자가 세상에 등장한 후부터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사칙연산을 수행하는 건 인간이었다. 기원전 30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 주판이 발명됐지만 주판은 사람의 계산을 도와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손가락 움직여 주판알을 튕기는 행위는 이를 지시하는 인간의 두뇌가 없다면 무용 지물이었다. 결국 1+1과 같은 단순한 계산도 인간의 두뇌가 없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이후 프랑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1623-1662)도 숫자를 더하고 빼는 계산기를 만들었다. 톱니바퀴를 연결해 덧셈과 뺄셈을 하는 구조였다. 일의 자리를 뜻하는 톱니바퀴가 한 바퀴 돌아가면 십의 자리 톱니바퀴가 10분의 1회전 하도록 했다. 파스칼은 세무국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도우려 계산기를 고안했다. 하지만 계산기가 수행할 수 있는 게 연산이 덧셈과 뺄셈에 불과했고 속도도 느려 널리 사용되진 않았다. 이후 독일 수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가 파스칼의 계산기를 발전시킨 톱니바퀴 계산기를 개발했지만 받아 올림과 받아 내림을 자동화하지 못했고 사용법이 불편해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산업이 성장하면서 빠른 계산이 필요했기에 마냥 사람의 손에서 계산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순 없을 노릇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게 수표(數表)다. 자주 쓰이는 계산식을 책에 미리 기록해 다른 사람이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해진 현금을 지급하도록 하도록 하는 유가증권의 일종인 수표(手票)와는 다르다. 미리 계산된 로그(log) 결과를 적흰 로그표가 대표적인 수표다. 로그표에 적힌 숫자를 조합하면 정해진 로그 계산 결과의 근삿값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수표를 통한 계산은 한계가 분명했다. 계산이 필요한 숫자를 일일이 확인해 인쇄된 책을 찾는 과정은 느리기만 했다. 수표 자체에 오류도 있었다. 그럼에도 배비지는 열정적으로 수표를 수집했다. 각종 수표를 수집하는 것 자체가 그의 취미였다.

    배비지는 수표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장치를 고민했다. 1819년 천문학 기기를 교정하는 과정에서 수표를 대신할 수 있는 계산 기계를 떠올렸다. 사람을 대신해 수표를 찍어내는 기계가 만들 수 있다면 수표를 신경 쓰지 않고 천문학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아가 만약 그 장치를 증기기관으로 작동할 수 있다면 사람은 계산 노동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동료들과 자신의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차이 기계에 대한 설계 작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 코딩의 탄생

    공대 그리고 대형 강의실

    대형 강의실은 무덥고 습했다. 200여 명이 한꺼번에 강의를 듣는 그 풍경은 공과대학에선 흔한 모습이었다. 전공필수로 정해진 통신 이론과 같은 수업은 항상 일정한 단차를 두고 책상을 쌓아 올린 대형 강의실로 배정됐다. 졸업을 하려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다 보니 복학생에 재수강생이 수업마다 몰렸다.

    통신 이론은 쉽게 말해 각종 무선 통신 수단의 작동 원리를 배우는 수업이다. FM과 AM 라디오가 어떻게 목소리와 음악을 전달하는지에서 시작해 스마트폰이 정보를 주고받는 과정을 익힌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전파를 이용해 먼 곳까지 음악을 전송하는 원리는 흥미로운 주제였지만 복학생이 많은 탓에 A학점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들은 눈빛만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강의실에서 에어컨은 힘을 쓰지 못했다. 에어컨 냉기는 백 명이 넘는 학생이 내뿜는 체온을 이겨내지 힘겨워했다. 그럼에도 분필을 들고 각종 이론을 설명하는 교수님은 열정에 넘쳤다. 

    칠판에는 각종 수식이 난무했지만 내가 주목한 건 통신 이론을 쌓아 올린 엔지니어였다. 영국 물리학자 제임스 맥스웰(1831~1879)은 1864년 전파의 존재를 주장했다. 1888년 독일 물리학자 하인리히 헤르츠(1857~1894)는 전파를 실힘적으로 증명했다. 헤르츠를 주파수의 단위로 사용하는 이유다. 그들이 있었기에 스마트폰으로 압축되는 디지털 혁명이 가능했다.

    공학을 이끄는 건 수많은 엔지니어

    공학은 한 사람의 천재가 이끌어가는 학문이 아니다. 수많은 엔지니어가 작은 돌을 쌓아 올려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그 과정은 공과대학의 대형 강의실과 닮았다. 콘크리트를 일정하게 쌓아 올려 만든 계단식 책상처럼 일정하게 쌓인 기술은 혁신을 거듭하고 마침내 세상을 바꾼다. 엔지니어는 자신의 시대에서 만들 수 있는 최신의 기술을 쌓아 올리고 이를 통해 공학은 발전을 거듭한다.

    컴퓨터의 등장과 디지털 시대의 발전 과정도 비슷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손가락 터치로 미국 시장에서 주식을 사는 건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 사이 디지털 기술이 빠르게 발전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도 계단식이다. 스마트폰과 디지털을 향해 엔지니어가 조금씩 쌓아 올린 기술이 있었기에 현재가 있는 것이다.

    덥고 습했던 대형 강의실의 계단을 떠올리게 된 건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디지털 산업을 취재하면서 그 시작점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호기심 넘치던 공대생 시절로 돌아갔다. 디지털 시대의 시작점과 발전 과정 그리고 이를 이끈 엔지니어의 활약은 학부 4년 동안 모두 배운 것들이었다. 물론 수식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공대 수업의 특성상 기술의 흐름과 엔지니어의 활약상을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4년이란 짧은 시간에 한 세기에 걸쳐 이뤄진 기술 발전을 압축해서 익혀야 하는 공대생에겐 이를 알아채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

    세상엔 지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 내겐 디지털이란 인류의 발명품이 그랬다. 공대 4년을 되돌아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이를 주도한 엔지니어의 단순한 아이디어였다. 그 시작은 수식이 아닌 짧은 질문이었다. 짧지만 날카로우면서 근본을 파헤치는 질문. 그 질문에 인간의 삶을 바꾼 디지털의 시작이 있었다. 복잡한 수식을 이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었다. 디지털 혁명의 속도는 점차 빨라져 이제는 인공지능이 삶까지 침투했다. 인공지능은 즐겨보는 영상에 맞춰 다음에 볼 것들을 추천해주고 에어컨 운전도 맞춤형으로 조절한다. 인공지능은 디지털 혁명의 끝이 아니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

    자동으로 계산하는 기계, 컴퓨터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거대한 창고에서 시작한 컴퓨터는 책상에서 무릎으로 이제는 당신의 손바닥까지 다가왔다. 컴퓨터 코딩은 학생들의 필수과목이 됐다. 이제는 컴퓨터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계산하는 기계, 다시 말해 컴퓨터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같다. 인간보다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계 장치다. 이를 관통하는 건 코딩이란 개념이다. 이는 컴퓨터의 본질을 살펴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글은 디지털 시대를 가능케 한 엔지니어들이 남긴 문서들을 되짚으며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살펴본다. 그곳엔 복잡한 수식보다 중요한 아이디어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공과대학 수업에선 배우기 힘든 하지만 결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은 것들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진행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