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발명품도 그 시작은 소박한 꿈이다. 밤하늘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보름달을 향한 꿈은 로켓 발명으로 이어졌다. 축음기는 목소리를 저장해 놓고 싶은 순수한 꿈에서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의 대표 선수이자 인류의 삶을 완벽하게 바꿔놓은 컴퓨터도 그 시작은 인간 대신 계산하는 기계장치였다.
스스로 계산하는 기계장치, 컴퓨터에 대한 꿈이 시작된 건 영국이다. 당시에는 현실이 되지 못했지만 그 꿈은 입력을 받아 정해진 계산을 마치는 현대적인 컴퓨터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자동으로 계산하는 기계식 장치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를 고민한 건 영국 엔지니어 찰스 배비지(1791-1871)다. 배비지는 공학뿐만이 아니라 수학, 철학과 발명에 관심이 많았다. 배비지가 고안한 건 기계식 컴퓨터였다. 현대적인 컴퓨터가 전자 신호를 통해 다양한 계산을 한다면 배비지가 고안한 건 톱니 등 각종 기계장치를 기반으로 한 기계식 컴퓨터였다.
배비지는 영국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영국 은행가에서 성공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경제적으로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배비지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7살 무렵에는 장난감을 분해하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장난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분해해서 살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학교에선 수학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에선 혼자서 미적분을 공부하기 위해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에 몰래 교실로 들어가 수학을 공부를 하기도 했다. 수학과 다양한 기계에 매료된 배비지는 1810년 캠브리지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그의 수학 사랑은 이어졌다. 당시 대학에서 수학과 공학은 주도적인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인문학을 중심으로 교과목이 짜여 있었기에 배비지는 그의 동료들과 수학을 스스로 익혀야 했다. 배비지는 동료들과 함께 해석 학회(Analytical Society)라고 불리는 모임을 만들어 프랑스어로 된 미적분학 교과서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해석 학회는 현재 미적분학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dy/dx(이전 x’에서) 표기법을 대중화하는데 기여했다. 이런 노력이 더해지면서 배비지는 영국 수학계에서 인정받게 된다. 배비지는 1812년 캠브리지 피터하우스로 학적을 옮겼고 그곳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는 가장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아 시험 없이 졸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영국 수학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졸업 후 왕립 연구소에서 천문학을 강의했다.
남부러울 게 없을 거 같던 그의 삶이 항상 순탄한 길만 걸어간 건 아니었다. 배비지는 결혼은 서둘러야 한다는 아버지의 조언으로 1814년 조지아나 휘트모어(Georgiana Whitmore)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이중 네 명은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도 결혼식을 올린 지 14년 만인 1827년 세상을 떠났다.
증기기관과 계산하는 기계
배비지가 계산하는 기계를 고안하게 된 건 당시 사회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계산하는 기계에 대한 아이디어가 영국에서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탄생한 증기기관은 산업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석탄이 내뿜는 연기와 흰색 증기는 도시의 모습을 하나 둘 바꿔놨다. 기계는 그동안 넘보지 못했던 영역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대신해 배틀을 짜고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렸다. 증기로 무장한 기계의 막강한 힘이 인력을 대체했다.
하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강력했던 증기기관도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앞서진 못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계산이었다. 당시 계산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었다. 숫자가 세상에 등장한 후부터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사칙연산을 수행하는 건 인간이었다. 기원전 30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 주판이 발명됐지만 주판은 사람의 계산을 도와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손가락 움직여 주판알을 튕기는 행위는 이를 지시하는 인간의 두뇌가 없다면 무용 지물이었다. 결국 1+1과 같은 단순한 계산도 인간의 두뇌가 없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이후 프랑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1623-1662)도 숫자를 더하고 빼는 계산기를 만들었다. 톱니바퀴를 연결해 덧셈과 뺄셈을 하는 구조였다. 일의 자리를 뜻하는 톱니바퀴가 한 바퀴 돌아가면 십의 자리 톱니바퀴가 10분의 1회전 하도록 했다. 파스칼은 세무국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도우려 계산기를 고안했다. 하지만 계산기가 수행할 수 있는 게 연산이 덧셈과 뺄셈에 불과했고 속도도 느려 널리 사용되진 않았다. 이후 독일 수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가 파스칼의 계산기를 발전시킨 톱니바퀴 계산기를 개발했지만 받아 올림과 받아 내림을 자동화하지 못했고 사용법이 불편해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산업이 성장하면서 빠른 계산이 필요했기에 마냥 사람의 손에서 계산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순 없을 노릇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게 수표(數表)다. 자주 쓰이는 계산식을 책에 미리 기록해 다른 사람이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해진 현금을 지급하도록 하도록 하는 유가증권의 일종인 수표(手票)와는 다르다. 미리 계산된 로그(log) 결과를 적흰 로그표가 대표적인 수표다. 로그표에 적힌 숫자를 조합하면 정해진 로그 계산 결과의 근삿값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수표를 통한 계산은 한계가 분명했다. 계산이 필요한 숫자를 일일이 확인해 인쇄된 책을 찾는 과정은 느리기만 했다. 수표 자체에 오류도 있었다. 그럼에도 배비지는 열정적으로 수표를 수집했다. 각종 수표를 수집하는 것 자체가 그의 취미였다.
배비지는 수표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장치를 고민했다. 1819년 천문학 기기를 교정하는 과정에서 수표를 대신할 수 있는 계산 기계를 떠올렸다. 사람을 대신해 수표를 찍어내는 기계가 만들 수 있다면 수표를 신경 쓰지 않고 천문학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아가 만약 그 장치를 증기기관으로 작동할 수 있다면 사람은 계산 노동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동료들과 자신의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차이 기계에 대한 설계 작업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