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수학자 조지 불(1815~1864)은 영국 링컨에서 1815년 11월 2일 태어났다. 링컨은 영국 수도 런던에서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아버지는 구두를 만드는 상인이었는데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들과는 둘도 없는 관계였다. 불의 아버지 존 불은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링컨 기계 협회(the Lincoln Mechanics’ Institution)에 참여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조지 불은 일찌감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학문에 눈을 떴으나 가정 형편으로 인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불은 외국어와 수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조지 불.
불은 16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가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생활전선에 나서야만 했다. 19살이 되던 해에는 링컨에 작은 학교를 열었고 독학으로 배운 지식을 나눴다. 그는 34살이 되던 1849년 아일랜드 코크에 신설된 퀸즈대에 교수로 임용되기 전까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했다.
그는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5개 언어에 능통했다. 불은 16살 무렵에 미분(微分) 담은 수학 논문을 읽을 정도 성장했다. 23살에는 첫 논문 ‘변동 미적분학의 특정 정리(On certain theorems in the calculus of variations)’를 썼다. 이 논문은 불의 처음으로 발표되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완성한 그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아들의 배움에 적극적이었다.
다양한 언어를 익혔던 불의 독학법은 훗날 그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불은 훗날 언어를 구성하는 논리와 수학을 결합하는 시도에 나선다. 불은 1839년 캠브리지로 가서 젊은 수학자 던칸 그레고리(1813~1844)를 만난다. 그레고리는 30살의 나이로 숨졌는데 불보다 2살이 많았던 그는 멘토를 자처한다. 고레고리는 불에게 논문 작성 방법 가르쳤고 불은 1841년 처음으로 수학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불은 영국 수학자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1806~1871)의 추천으로 퀸즈대 수학 교수로 임용됐다. 신생 대학이던 퀸즈대는 설립 초기 200여 명의 학생을 20명의 교수가 가르쳤다. 불은 20명의 교수 중 한 명이었다.
드모르간은 런던 수학회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수학회의 첫 번째 회장을 역임했다. 드 모르간의 법칙으로 알려진 그는 숫자를 가지고 노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드 모르간은 “수학적 발견의 동력은 추론이 아니라 상상력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교수직을 맡은 불은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는 교수 부임 후 6년 동안 15편의 논문을 써냈다. 미분과 적분 등 일반적인 수학에 대한 연구에 전념했다. 불은 수학계에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1844년에는 ‘분석에 대한 일반적인 방법론(On a General Method in Analysis)’으로 영국왕립학회가 수여하는 로열 메달(Royal Medal)을 수상했다. 로열 메달은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한다.
불이 쓴 논리에 대한 수학적 해석(Mathematical Analysis of Logic)의 표지.
불이 독창적인 연구를 선보인 건 1847년이다. 논리에 대한 수학적 해석(Mathematical Analysis of Logic)이란 책을 통해 논리와 수학의 결합을 시도한다. ‘연역적 추론의 계산에 대한 에세이(BEING AN ESSAY TOWARDS A CALCULUS OF DEDUCTIVE REASONING)’라는 소제목이 붙은 책은 90여 페이지 분량이다. 불이 시도한 건 논리를 수학적으로 푸는 과정이다. 여기서 잠깐. 논리라는 게 뭔가. 논리는 사고 작용이 밟는 과정이다. 인간의 사고는 일정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를 드러내는 과정이 바로 논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일례로 비가 오면 우산을 챙겨서 나가야 한다. 지극히 단순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런 사고의 과정에는 인류가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압축돼 있다. 논리학은 사고작용의 법칙과 형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