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를 전송하는 과학 기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1877년 벨이 가디너 허바드, 샌더스 등과 함께 벨 전화회사(Bell Telephone Company. 오늘날 AT&T의 전신)를 설립했다. 1877년 4월에는 보스턴에 있는 벨의 작업장과 서머빌 근처 찰스 윌리엄스의 집 사이에 최초의 전화선이 개설됐고, 같은 해 여름에는 당시의 ‘얼리어답터’ 200여 명(대부분 사업상의 필요에 의해 신청한 사업가들)을 위해 보스턴에 최초의 교환대가 설치됐다. 그후 10년 만에 미국 내 전화기 보급은 15만대를 넘어섰다. 벨과 왓슨은 전화기 대중화를 위해 순회 설명회를 열기도 했는데 사람의 음성이 전선을 타고 5Km 떨어진 곳까지 전달되는 건 마법에 가까웠다. 요즘에 비유하면 리얼리티쇼와 비슷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왓슨이 전화기를 통해 인사하고 노래를 부르면, 청중은 크게 놀라고 신기해했다. 소문이 퍼지면서 대중들은 설명회 입장권을 구하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섀넌은 학창시절 기계장치를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다. 라디오를 가지고 노는 것에 흥미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각종 통신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1km 떨어진 친구의 집과 전선을 연결해 모스 코드를 주고 받기도 했다.
작은 시골 마을의 게이놀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2년 미시건대에 입학한다. 대학 입학 4년 만인 1936년, 섀넌은 전자공학과 수학 2개 학위를 받았다. 섀넌은 조지 불(George Boole)과 그에게서 탄생한 불 대수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인생에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우연이 전환점을 만들기도 한다. 섀넌에겐 학부 게시판에 붙어 있는 작은 게시물이 그것이었다. 섀넌의 눈에 들어온 건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교수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 1890~1974)가 조교를 모집하는 공고였다. 부시는 자신이 발명한 미분 해석기(Differential Analyser) 운영을 담당할 수 있는 조교를 뽑았다. 미분 해석기는 휠과 디스크로 이뤄진 일종의 아날로그 컴퓨터다. 적분을 활용해 미분 방정식을 역으로 계산하는 원리였다.
바네바 부시는 2차 세계대전 중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맨하튼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이중 하나였다. 그는 컴퓨터와 자동 계산 장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메멕스(MEMEX)라는 기억 확장기를 주장하는 등 당시에는 혁신적인 생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부시는 1945년 7월 애틀랜틱 기고문을 통해 다가올 미래를 예견했다. 그가 꿈꾼 미래는 현실이 됐다.
“미래에 생겨날 장치를 생각해 봐라. 일종의 기계화된 개인 파일이나 저장소를 생각해 보라. 이름이 필요하면서 무작위로 메멕스(memex)라고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읽고 싶은 책을 저장해 놓고 듣고 싶은 음악도 담아둘 수 있다. 기계화된 통신 수단은 빠른 속도로 전송되고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기억을 보충하는데 쓰일 것이다. 메멕스는 마이크로 필름 형태로 구입할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책과 그림, 정기간행물, 신문을 이런 식으로 구입해서 보관할 수 있다.”
“두 세기 전에 라이프니츠는 키보드로 무장한 계산 기계를 발명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널리 쓰이지 못했다. 당시 경제 상황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대량생산이 가능하지 않았다.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계산을 하는 노동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섀넌은 MIT로 향해 부시의 미분해석기를 마주한다. 독창적인 미래를 꿈꾼 학자를 만난 건 섀넌에게 큰 기회였다. MIT 수학과에서 일하던 섀넌은 1937년에는 여름 방학을 맞아 벨 연구소를 찾아 연구를 진행했다. 당시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라디오와 TV가 여전히 정보 전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섀넌이 벨 연구소로 향하던 그해 미국 NBC 방송국은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영입해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한다. 크리스마스 밤 새롭게 단장한 RCA의 스튜디오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비발디의 ‘콘체르토 그로소’가 전파를 타고 방송됐다. 기술의 진보는 콘서트홀 대신 방송 스튜디오를 오케스트라의 무대로 만들었다.